족보는 보학의 한 분야로서 한 종족의 계통을 부계중심으로 체계적으로 나타낸 기록으로, 동일 혈족의 원류를 밝히고 그 혈통을 존중하고, 계승하며 자랑스런 조상의 행적을 답습하고 동족간의 화목을 도모하기 위한 가문의 역사책이다.조선 중.후기에까지 족보가 없던 우리 선조님 덕산파이신 유장공(숙종 1676년생)께서 처음으로 자료를 수집하여 족보편찬을 위한 사고를 가지고 계시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서거 하심으로 死藏케 되었다.그 후 86년이 지난 1762년 임오년에 손자되시는 홍신공과 명신공께서 유장조부의 원고를 찾아 더욱 자료를 추가하여,1768년 무자년 7년에 걸쳐 무자보(제1보 영조45년)창간 이후 병술보(제2회보 순조 27년 1826년),갑자보(제3회보 고종2년 1864년),신묘보(제4회보 고종29년 1891년),병자보(제5회보 순종 경술국치후 1936년),임인보(제6회보 대한민국 1962년), 갑자보(제7회보 1984년)등을 발간케 되었다. 7보까지 발간하면서 입보되지않았던 많은 종친께서 수록되는 과정에 행열문제가 대두되었고,또한 상계의 세대수가 바뀌게 됨으로 많은 혼란을 가져오게 되었다.특히 왜정시대 즉 병자보때는 姜必東家藏灣姓譜(강필동가장만성보)(姜本)에 교동인씨의 세계(1세부터 47세)가 발견되어 그간의 상계변화에 근 영향을 주게 되었다.그러나 선조들께서는 그때까지 내려온 상계와 강본의 상계가 차이가 있어 신중을 기하기위하여 병자,임인보에는 수정을 보류하고 다만 참조사항으로 하였다가 전파중인 대동보의 출간을 시도한 갑자보(1984년)때 갑자기 그 간의 상계와 강본간에 세대조정으로 종친간의 불화의 씨앗이 되었고, 많은 부분에 오류가 생겨 2005년도 대종회에 특별위원회를 설치하여 그간 항열 조정없이 입보된 종인들의 항열조정과 파간의 항열을 심의하기로 만장일치로 가결하여 이 모든 문제가 해결된후에 대동보를 재편찬키로 하였으나 입보된지 얼마안된 항열조정을 받아야 할 분이 전 대종회장을 맡고 있었고[참고 : 2006년 병술보에 수록된 이분의 이력을보면 “仁荷大三年修了喬桐印氏大宗會七代(九○-;九一年)會長喬桐印氏獎學會設立募金判官公派六二世漢洙義士褒賞申請建國勳章愛國章受勳大田國立墓地愛國先烈墓域으로遷墓喬桐印氏略史最初執筆自費發刊配布大宗會十四代會長丙戌譜編纂委員長韓國姓氏總鑑喬桐印氏編輯編纂],또한 덕산파와 면천파의 항열조정이 학술적으로 여러가지 면에서 잘못된 점이 입증되는 연구 결과가 합리적으로 지적되어 재조정을 시도하려고 노력하였으나 전 대종회장이 면천파에 입보된 종인으로 편파적인 행동을 함으로써, 그리고 면천파 종인들도 그 내용을 인정하면서도 반대하여 결국 항열조정이 무산되어 2006년 속칭 병술보의 족보는 반발로 덕산파와 함창파 면천파일부는 참여하지 않았으므로 대동보라 인정할 수 없고 특히 1984년에 수록된 덕산파 함창파 족보를 불법 전기하여 발간하게 되었다. (속칭 2006년 병술보) 따라서 함창파와 덕산파는 인정하지 않고있다. 특히 덕산파 선조께서 족보 편찬의 원조이고 교동인씨의 첫족보인 무자보(1768년)는 물론 선대의 산소들이 그대로 현존하고있고 아주 모범적인 파라하겠다.